내년 7월 장애등급제 폐지를 앞두고, 장애계에서는 개인의 욕구와 환경을 포괄적으로 평가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조사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시각장애계에서는 시각장애 특성을 반영하지 않았다며 지난 3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피켓 시위를 진행했고, 정부 투쟁까지 선포한 상태다.
실제로 장애등급제 폐지 민관협의체의 시범사업 모니터링 결과, 전체 시각장애인 복지서비스양이 7.6% 줄어들고,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은 9.1시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사각지대는 성인지적 관점까지 필요한 시각장애 여성이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종합조사표는 시각장애 여성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시각장애 여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안전 문제와 육아 활동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거든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복지위원회 정아영 부위원장은 지난 7월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 이후 활동지원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돌봄지원 종합조사표 속 ‘서비스 필요도 평가’를 받아본 후, 시각장애 여성을 대표해 ‘총대’를 맸다.
그는 인터뷰 서두에 “장애등급제 폐지는 시혜의 관점에서 사회와 함께할 권리, 도움받을 권리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고, 개인별 특성과 욕구를 반영한다는 취지 자체는 너무 환영이다. 문제는 그 특성을 세세하게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며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장애등급제 폐지 민관협의체에 시각장애인 위원이 없어서 종합조사표를 늦게 받아봤어요. 여성은 당연하고, 시각장애 특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더라고요.”
■종합조사표 점수 매겨봤지만…“아이고 의미 없다”
일단 시각장애 특성이 얼마나 반영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와 만나 현재 발표된 돌봄지원 종합조사표 속 ‘서비스 필요도 평가’에 점수를 매겨봤다.
돌봄 서비스 필요도 평가는 ▲기능적 제한(ADL 13개, IADL 8개, 인지․행동특성 8개) ▲사회활동(2개) ▲가구환경(6개) 영역의 총 37개 지표로 구성된다. 총 596점 중 기능적 제한이 532점이나 차지한다. 하루 최대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 시간은 16.84 시간.
“‘옷 갈아입기’ 할 수 있어요?” 기자가 묻자 정 부위원장은 “어.. 옷 자체는 갈아입을 수 있긴 한데.. 애매한데요?”라며 웃었다.
전맹 시각장애인인 그는 옷 자체는 갈아입을 수 있지만, 옷을 입기 전에 색을 구별하지 못하며 날씨에 안 맞는 옷을 선택할 경우 다시 돌아와 갈아입어야 하는 번거로움의 문제가 있다.
또 평소 비비크림과 파우더, 립스틱 바르기 정도의 화장을 하는 그는 “그냥 제가 알아서 감으로 하긴 하는데, 제대로 잘 됐는지 모르죠.”라고 했다. 단순 ‘옷 갈아입기’가 아니라 ‘옷 선택 및 관리’, ‘세탁하기’ 등으로 세분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다음 문항으로 넘어갔다. “‘목욕하기’ 가능해요?” “..목욕 자체는 가능한데, 샴푸, 린스, 바디로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럴 땐 ‘지원 불필요’, ‘일부 지원 필요’, ‘상당한 지원 필요’, ‘전적 지원 필요’ 중 어떤 항목에 체크해야 할까? 정 부위원장은 “린스랑 샴푸랑 헷갈려서 머리를 4번이나 감은 적도 있어요. 샴푼지, 린슨지 어떤 건지 인지할 수 있는 조항이 필요한거죠.”
그 외 음식물 넘기기,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옮겨 앉기, 앉은 자세 유지, 배변, 배뇨 등의 문항은 그와 무관 했다. 함께 평가표 총점을 매겨보기로 했지만, 큰 의미가 없어 중단했다.
■시각장애 여성 ‘안전·육아’ 가장 큰 걸림돌
정아영 부위원장은 종합조사표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현재까지 총 50명의 시각장애 여성들을 직접 만나 심층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인터뷰 결과, 시각장애 여성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안전’과 ‘육아’ 였지만, 종합조사표 상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문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가방을 잡았대요. 마침 가족이 문을 열어서 ‘누구세요’ 하니까 도망가버리고. 어떤 남자가 와서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이상하게 접근하기도 하고요. 시각장애 여성들은 각종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임신, 출산 및 육아와 관련해서도 종합조사표 속 문항에 담겨있는 것은 없다.
앞서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박혜경 상임대표는 복지부 토론회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으며 민관협의체에 공식적으로 임신, 출산 등 조사 문항이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 부위원장은 “시각장애 여성 또한 마찬가지”라며 공감했다.
남성 시각장애인과 결혼했어도, 심지어 남편이 비장애인이어도 가사와 육아는 시각장애 여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시각장애가 있는 엄마는 아이의 변 색깔 확인, 이유식 만들고 먹이기 등 더 세밀한 부분이 반영돼야 한다고.
“아이 머리도 예쁘게 묶어주고 싶은데, 내가 하지 못할 때. 이럴 때 자괴감이 들죠. 아이의 가정통신문을 읽을 수 없고, 미술공부 또한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 이런 어려움을 누가 알아줄까요?” ▲ 지난 3일 서울 이룸센터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주최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단체 토론회’ 전경.ⓒ에이블뉴스
■특성 반영한 종합조사표 항목, “복지부에 요구할 것”
이에 정 부위원장은 시각장애 여성의 특성이 반영되는 종합조사표 문항을 3차 수정을 거쳐 총 6개 항목으로 추렸다. 이후 보완을 거쳐 최종 문항이 완성되면 복지부에 공식적으로 요구할 예정이다.
현재 완성된 6개 문항은 ▲여성이어서 외출시 화장실 안내 혹은 위치를 물어보는데 어려움이 있는가 ▲같은 이유로 외출 시 남성 안내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해서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 또는 수치심을 느끼는가? ▲여성이기에 각종 생활 부분과 병원, 한의원 등에 가야 하는 이유로 집에서나 외출시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상황에 빈번하게 노출돼 있는가? 등이다.
이 문항들에 대해서는 남성 위주의 시각장애계에서도 “굳이 필요한가?”라는 의문도 있었다. 이에 정 부위원장 또한 할 말은 있다.
“시각장애 특성상 안내를 받고, 접촉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남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정보도 알려줘야 할 경우도 있고 화장실 위치도 그렇고요. 어떤 남성 분은 길을 우기기도, 돌아서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해요(웃음).”
이외에도 육아 관련 문항으로 ▲시각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가족에 비해 더 많은 가사 활동을 하는가 ▲임신 출산과 관련해 교육과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가 ▲육아 참여시 시각장애가 있는 엄마여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는가 등도 함께 포함됐다.
“시각장애 여성은 2중, 3중의 차별을 겪고 있거든요. 특성을 반영한 문항이 포함된다면 여성으로서 사회와 소통하는 매개가 되고, 엄마로서 역할을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를 위한 정책이 아닌, 함께 하는 정책으로 변화됐으면 좋겠어요. 한 마리 양을 찾는 예수의 마음처럼 복지부도 소수자의 목소리를 꼭 들어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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