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시는 송명희 시인의 ‘나’이다. 송명희 시인은 중증 뇌병변(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 울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어머니가 몸이 약해 젖도 먹이지 못하고 우유도 사 먹이지 못하는 가난한 집안이라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외로움과 고통이 너무 컸다.
송명희 시인이 16살 되던 해, 그녀가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약하고 보잘것없던 깨어진 질그릇을 하나님은 잘난 것들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전하신다는 내용이다. ‘나’는 송명희 시인의 많은 시 중의 하나로 찬양곡으로 불리고 있다.
필자가 정재문 씨를 만났을 때 좋아하는 시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라고 대답하면서 불러 봐도 되냐고 했다. 정재문 씨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난 후 필자는 힘껏 손뼉을 쳤다.
정재문(1995년) 씨는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별문제 없는 보통의 아이였다.
정재문 씨와 필자가 만났을 때 할머니가 동행했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정재문 씨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구분하기 위해 앞에 표시하였다.
할머니: “아기들이 있는 집에는 보통 모빌을 달아 두는데 재문이가 모빌을 안 보는 거예요. 그래서 당장 다음 날 부산에서 제일 잘한다는 안과에 데리고 갔습니다. 자기네들은 잘 모르겠다고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가라기에 또 부산대학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봤지만, 아직 아이가 어려서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6개월 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6개월 후 부산대학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지난번 했던 검사를 다시 했고 결과는 시신경 손상이라는 답변이었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고 했다.
할머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대학병원 유영석 박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위자였거든요. 하지만 우리의 작은 희망과는 상관없이 결과는 똑같은 시신경 손상이고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할머니는 의사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개안수술을 한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났다.
할머니: “나는 이제 다 살았으니 내 눈이라도 좀 이식해 주이소.”
의사: “할머니 이 손 좀 놓고 내 이야기 들어 보세요. 아무리 좋은 텔레비전을 갖다 놔도 전기가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얘는 전기 즉 시신경이 죽어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1년 후에 다시 오라고 했지만 이미 시각장애 판정을 받았고, 검사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 이후로는 안 갔다고 했다.
정재문: “어머니께서 동화책을 정말 많이 읽어 주셨는데 제가 동화책 내용을 다 외울 정도였어요. 동요도 정말 많이 불러 주셨어요.”
그 무렵 재문 씨의 아버지는 컴퓨터 판매점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동생을 임신 중이었다.
할머니: “하루는 재문이랑 둘이 집에 있는데 텔레비전 화면 아래에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재문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자막은 **복지관에서 점자교육을 한다는 것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문구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고, 재문이를 업고 버스를 타고 **복지관을 찾아갔다.
할머니: “**복지관에서는 중도 실명자를 위한 점자교실이라 대부분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시각장애인 손자를 위해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점자교실에 열심히 나갔다.
할머니: “점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기역은 사점, 니은은 일사점, 디귿은 이사점……. 노래를 가르쳐 주셔서 지금도 점자는 다 기억합니다.”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서 못할 것이 없었다. 아이를 업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복지관에서 점자를 배우면 재문이는 복지관이 할머니 학교라고 했다. 할머니는 운전면허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운전하지 않았고 아이가 부산맹학교를 다닐 때는 운전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 “재문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점자를 가르쳤는데 특별히 가르칠 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배우는 점자교실에 따라다니면서 이미 점자를 다 익혔던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어서 전국에 있는 유치원을 수소문했습니다.”
“이 애를 어디에 보내야 제대로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전화를 해서 알아보고, 전국에 있는 맹학교에도 다 전화하고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충주맹학교였다. 현재는 충주성모학교다.
부산맹학교에도 유치부가 있는데 어린아이를 왜 그 먼 곳까지 보냈을까.
할머니: “부산맹학교는 생각도 안 났고, 충주맹학교는 가톨릭에서 수녀님들이 운영하고 있어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재문이를 충주맹학교 유치부에 입학시켰다. 재문이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어린아이가 그런대로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 “내가 고집을 부려서 재문이를 충주맹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왜 그리 눈물이 나든 지…….”
토요일이면 재문이를 데리러 갔다. 아들이 승용차로 갈 때는 며느리와 재문이와 함께 놀이공원도 갔다가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지만,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쯤 가고 나머지는 할머니가 혼자 갔다.
할머니: “혼자 갈 때는 새벽 다섯 시에 구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 충주역에 내리면, 내가 뭔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나 싶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할머니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면서 충주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가서 재문이를 데리고 나왔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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